
초등 남자아이 10명 중 7명이 글쓰기를 싫어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저희 9살 첫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 후 일지를 쓰자고 하면 "쓸 게 없어"라는 답변만 돌아왔고, 책을 읽고 나서도 줄거리를 물으면 "기억 안 나"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독서교육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접근법을 완전히 바꿨더니, 글쓰기를 거부하던 아이가 스스로 쓰겠다고 나선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남자아이 글쓰기, 부정적 감정이 답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쓰기를 유독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초등 시기 남아는 에너지가 넘쳐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고,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정적인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성향이 있는 아이들의 경우 더욱 어려움을 겪는데, ADHD란 집중력 유지가 어렵고 충동적 행동이 잦은 신경발달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제일 화났던 일을 써봐"라는 한 마디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아침에 아빠한테 혼나 게임기까지 빼앗긴 아들에게 저녁에 "아빠한테 얼마나 화났는지 일기로 써봐"라고 제안했더니, 투덜거릴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웃으면서 머릿속으로 뭘 쓸지 생각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일기나 글쓰기에서 긍정적인 내용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좋았던 일", "감사한 일"을 쓰라고 하죠. 하지만 글의 본질은 문제적 지점을 들여다보는 행위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 사회적 억압이나 개인적 고통이 있던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한국 문학이 꽃을 피웠고, 2차 세계대전 이후 20-30년간 세계 문학과 철학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체적인 글쓰기 지도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요즘 제일 싫은 친구나 동생에 대해 쓰게 합니다
- 비속어나 욕은 써도 되지만 읽는 사람이 설득되게 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입니다
- 구체적인 장면부터 시작하게 합니다 ("야 OO아!" 소리 지르는 장면 등)
이렇게 쓴 글은 살아있는 생생한 글이 됩니다. 제 아들도 아빠에 대한 억울함을 글로 쓰는 과정에서 감정이 해소되고, 동시에 자기 감정을 객관화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독서 편식은 오히려 축복이다
공룡 책만 읽는 아들을 보며 저는 내심 걱정했습니다. 여러 분야를 골고루 읽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이는 독서를 음식 섭취처럼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독서는 문화생활입니다. 어른들도 문화생활 할 때 균형을 맞추지 않습니다. 하루는 운동, 하루는 음악, 하루는 그림 이렇게 하지 않죠. 독서라는 문화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책은 읽고 이해하는 수고로움이 드는 활동인데,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읽게 하는 것은 오히려 독서 자체를 싫어하게 만듭니다.
제 아들은 어릴 때부터 공룡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만 집중적으로 읽었습니다. 이제는 트리케라톱스, 스피노사우루스, 벨로키랍토르 같은 생소한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고, 지질시대별 특징과 멸종 원인까지 설명합니다. 그 나이에 처리하기 어려운 수준의 정보를 혼자 소화해낸 것입니다.
이런 '덕후' 성향의 아이들은 독서 지도가 오히려 쉽습니다. 좋아하는 분야 책만 계속 제공하면 스스로 몰입해서 읽기 때문입니다. 2023년 서울대 입학생 독서 성향 조사에 따르면, 상위권 학생들의 70% 이상이 어릴 때 특정 분야에 집중한 편식 독서를 했다고 답했습니다(출처: 서울대학교 입학본부).
독서 편식을 막는 것은 "책을 재미없게 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 같은 글로벌 리더들도 어릴 때는 SF나 과학 분야만 파고드는 '덕후'였습니다. 한 분야를 깊이 파는 과정에서 형성된 문해력과 정보 처리 능력이 이후 다른 분야 학습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됩니다.
불안을 직면해야 각성한다
최근 들어 저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자기 전이나 기상 직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낄 때 저는 틈틈이 유튜브를 봅니다. 불안을 직면하기 싫어서 스마트폰으로 도피하는 것이죠. 정작 아이들에게는 영상을 보지 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수업을 못 알아듣고, 숙제를 제때 못 하고, '이러다 고등학교 못 가는 거 아니야?'라는 불안이 올라올 때 스마트폰이 있으면 즉시 그것으로 도피합니다. 불안하긴 한데 직면은 하지 않고, 불안한 상태만 지속되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의 경우 특히 초등 때는 책상 위를 날아다니는 수준입니다. 과연 호모사피엔스 범주에 넣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산만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중학교 1-2학년이 되면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날아다니던 아이가 어느 날 보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압력, 즉 '이러다 인문계 고등학교 못 간다'는 공포가 아이를 각성시킨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단순해서 한 번 뼈저리게 각성하면 확 덤벼듭니다. 너무 불안한 나머지 학습량 조절에 실패해서 과하게 공부하고, 그 결과 성적이 팡 튀어오릅니다. 평균 50점대였던 아이가 갑자기 93점을 받는 식입니다.
저는 아들에게 미리 챙겨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숙제를 리마인드해주고, 준비물도 미리 챙겨줬죠. 하지만 이는 아이가 불안을 느낄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나봐야, 준비물을 안 가져가서 곤란해봐야 스스로 챙기게 됩니다. 문해력과 각성, 이 둘이 만나면 성적이라는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남자아이 글쓰기와 독서는 결국 '자연스러운 동기'를 찾아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정적 감정을 글로 쏟아내면서 글쓰기의 재미를 발견하고, 좋아하는 분야 책을 마음껏 읽으며 문해력을 쌓고, 불안을 직면하며 스스로 공부할 이유를 찾는 것.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아이는 비로소 자기주도적 학습자로 성장합니다. 저 역시 아들이 오늘 일기장을 펼쳐들고 "아빠, 오늘부터 매일 쓸 거야"라고 약속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