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만화책만 읽으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본 적 있으신가요? 글밥이 없는 책만 보는 것이 독서라고 할 수 있는지, 그냥 두면 계속 만화책만 볼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으려다가 오히려 독서 자체를 싫어하게 만들 뻔했습니다.
만화책을 막으려다 생긴 일
준이가 Anh Do의 Ninja Kid, Hot Dog 같은 그래픽 소설 시리즈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그림이 많고 글이 적은 책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뒀습니다. 그런데 그 시리즈만 계속 읽으려 하자 슬슬 걱정이 됐습니다. 좀 더 글이 많은 책을 읽어야 문해력이 늘 텐데 싶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제가 고른 책들을 함께 빌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글이 많고 내용이 풍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준이는 그 책들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반납하는 날까지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면서 Anh Do 책도 덜 읽기 시작했습니다. 독서 자체가 시들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개입한 것이 오히려 독서 흥미를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방향을 바꿨습니다. 도서관에서 책 고르는 것을 완전히 준이에게 돌려줬습니다. Anh Do 시리즈를 또 빌리고 싶다고 해도 그냥 빌렸습니다. 같은 책을 또 읽고 싶다고 해도 막지 않았습니다. 독서가 즐거운 것이라는 감각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서 동기 연구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책을 읽을 때 읽기 능력과 독서량이 모두 증가한다고 합니다. 특히 그래픽 소설과 만화책은 시각적 서사를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고, 독서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형성하는 데 효과적인 형식이라고 합니다. 만화책이 진짜 독서가 아니라는 것은 편견입니다. (출처: National Literacy Trust - Comics and Graphic Novels)
만화책이 더 긴 책으로 이어졌습니다
Anh Do 시리즈를 충분히 읽고 나서 어느 날 준이가 David Walliams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Anh Do보다 훨씬 글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제가 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고른 것이었습니다. Granny Gangster라는 책이었는데, 준이가 그 책을 읽고 나서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읽는 책의 폭이 자연스럽게 넓어졌습니다.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라는 꽤 긴 시리즈도 스스로 찾아서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빌려 읽었습니다. 어느 날 그 책의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이야기해줬습니다. 제가 억지로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준이가 준비됐을 때 스스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만화책에서 시작한 독서가 긴 이야기책으로 이어졌고, 그 경험이 독서 자체를 즐기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만화책을 막았다면 이 흐름이 생겼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서 편식이 나쁘다는 생각은 어른의 기준입니다. 아이의 독서 발달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장르나 형식에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읽는 경험이 쌓일 때 문해력과 독서력이 함께 발달합니다. 특정 장르에 빠져드는 경험이 독서의 폭을 넓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됩니다. (출처: Reading Rockets - Graphic Novels and Literacy)
독서 편식을 걱정하기보다 독서 자체를 지켰습니다
지금도 준이는 특정 장르를 편식합니다. 모험 이야기, 유머가 있는 이야기를 특히 좋아합니다. 진지한 문학이나 정보 도서는 아직 잘 읽지 않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장르가 있다는 것이 독서를 계속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독서 교육을 이야기할 때 균형 잡힌 독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 비문학, 정보 도서를 골고루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균형을 강요하다가 독서 자체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 더 큰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것이 더 오래 가는 방식입니다.
지안이는 아직 그림책 단계입니다. 같은 그림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냥 읽어줍니다. 몇 번째인지 세지 않습니다. 그 반복이 지안이에게 책이 즐거운 것이라는 감각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준이가 그랬던 것처럼, 지안이도 그 감각에서 출발해서 스스로 독서의 세계를 넓혀갈 것입니다.
만화책 금지를 포기하고 나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준이가 책을 가까이 두게 됐다는 것입니다. 읽어야 해서가 아니라, 읽고 싶어서 책을 집어 드는 아이가 됐습니다. 그것이 어떤 독서 교육보다 값진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