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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는 아이보다 잘 듣는 아이 - 경청, 질문, 감정조절이 만드는 관계력

by jamieseo1999 2026. 4. 29.

경청하는 아이들
경청하는 아이들

학기 초와 학기 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아이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으신가요? 초등학교 교사 이은경 선생님은 학기 초에는 외향적이고 눈에 띄는 아이들이 주목받지만, 학기 말이 되면 조용히 곁에 있어주고 잘 들어주는 아이들이 신뢰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준이 얼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준이는 말이 많은 아이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아이이기도 합니다.

 

말이 많아도 배려가 있는 아이

 

어느 날 방과 후 준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준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혼자 나오는 게 아니라, 옆 친구의 소지품을 한아름 챙겨서 먼저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폐와 ADHD를 동시에 앓고 있는 아이입니다. 준이는 그 친구의 물건을 다 챙겨준 다음에야 본인 가방을 들었습니다.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제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보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했습니다. 그 친구는 매년 연말에 준이와 같은 반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벌써 5년째 같은 반입니다.

 

이은경 선생님이 말한 "학기 말에 신뢰를 얻는 아이"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화려하게 주목받는 아이가 아니라, 곁에 있으면 편안하고 믿음이 가는 아이. 말수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회적 유능감(Social Competence)이란 또래 관계에서 적절하게 상호작용하고,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며 협력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유능감이 높은 아이들은 학업 성취도도 높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연습되며 길러집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책을 읽다가 질문이 멈추지 않는 아이

 

요즘 준이와 함께 어린 왕자를 읽고 있습니다. 머리말을 읽는데, 작가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사고로 실종됐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준이가 멈췄습니다. "작가가 진짜 비행사였어요? 왜 실종됐어요? 찾았어요?" 질문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준이는 책을 읽다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궁금하면 반드시 물어보고, 직접 찾아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책 읽는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아 솔직히 조금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냥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안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살아있는 독서였습니다. 텍스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궁금한 것을 스스로 파고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은경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생각을 한 후에 질문하는 아이"를 눈여겨본다고 했습니다.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질문을 하는 아이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하는 습관은 학교에서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 집에서 부모와 나누는 일상 대화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합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질문은 메타인지의 출발점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식해야 질문이 나오고, 질문을 통해 생각이 깊어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메타인지 능력이 높은 아이들은 학습 효율이 높고,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 강합니다. (출처: Flavell, J.H., Metacognition and Cognitive Monitoring, American Psychologist)

 

도블 게임에서 진 날 밤

 

얼마 전 준이와 도블이라는 보드 게임을 했습니다. 자신이 지고 있다는 걸 느끼자 준이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몇 번 주의를 줬지만 결국 게임에서 지자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그 순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준이가 좀 잠잠해지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게임은 즐겁기 위해서 하는 건데, 그렇게 화를 내면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없어." 그날은 그걸로 끝냈습니다.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준이가 등교할 때 가볍게 물었습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엄마랑 다시 게임할까? 대신 어제처럼 화내면 안 되는 거야." 준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방과 후 다시 게임을 했습니다. 첫 번째 게임에서 준이가 졌습니다. 그런데 전날과 달랐습니다.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게임은 준이가 이겼고, 활짝 웃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기는 준이보다 감정을 조절한 준이가 더 대견했습니다.

 

이은경 선생님은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홧김에 행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부모가 감정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배운다고 강조합니다. 저도 그날 화내는 준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게, 준이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모델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 전달법(I-Message)이란 상대방의 행동을 비난하는 대신, 그 행동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를 전달하는 대화 방식입니다. "너는 왜 항상 그래"가 아니라 "네가 소리를 지르면 엄마는 같이 게임하기가 힘들어"처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심리학자 토머스 고든(Thomas Gordon)이 제안한 이 방법은 아이의 방어심을 낮추고, 감정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이 방식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출처: Gordon Training International)

 

결국 아이의 관계력은 말을 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궁금한 것을 질문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감정이 앞설 때 한 박자 멈출 줄 아는 것. 이 세 가지가 쌓이면서 아이는 학기 말에도 곁에 있고 싶은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집에서, 부모와의 일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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