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환경 학습지보다 강력했던 것

by jamieseo1999 2026. 4. 19.

부모와 함께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
부모와 함께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

준이 친한 친구가 구몬 학습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저는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준이는 태권도, 수영, 피아노를 하고 있었습니다. 운동도 하고, 예술도 하고 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 밀려왔습니다. 친구 엄마는 하고 있는데, 나는 엄마로서 뭔가를 빠뜨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준이에게 물어보니 기꺼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기대도 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학습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부 습관이 잡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렇게 구몬을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는 아이에게 그만 읽으라고 했습니다

방과 후에는 과외 활동이 있어 집에 오면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학습지는 아침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분량을 등교 전에 마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준이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 책을 빼앗고 학습지를 내밀었습니다. "밥 먹고 학습지 먼저 해야지."

스스로 책을 읽고 있는 아이에게 그만 읽으라고 나무라면서 학습지를 시키는 상황이 매일 반복됐습니다. 하기 싫다고 짜증을 내는 날도 있었고, 그러면 저도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시작한 건 끝까지 해야 한다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찜찜했습니다. 이게 맞는 방향인가. 이러다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나중에 준이에게 왜 학습지를 하겠다고 했냐고 물어봤습니다. 아이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안 한다고 하면 엄마가 실망할 것 같았어요." 그 말이 한참 머릿속에 걸렸습니다.

여기서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라는 개념을 짚고 싶습니다. 외재적 동기란 칭찬, 보상, 타인의 기대처럼 자신 바깥에서 오는 자극에 의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동기는 그 자극이 사라지면 행동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준이가 학습지를 하겠다고 한 건 배움의 필요를 느껴서가 아니라, 저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 기반 위에서는 어떤 학습 습관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아무도 공부하라고 하지 않은 오후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남편은 식탁에 앉아 요즘 하고 있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소파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특별히 계획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첫째가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들고 소파 옆에 앉았습니다. 둘째는 식탁으로 가더니 Reading Eggs 앱을 켜달라고 했습니다. 읽기와 수학 공부를 스스로 시작한 겁니다. 아무도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네 식구가 각자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두 시간 정도 이어졌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학습지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게 원래 공부가 일어나는 방식이구나 싶었습니다.

또 다른 날 소파에서 제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둘째가 와서 책을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함께 빌려온 그림책이었습니다. 지루하지 않게 최대한 재밌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첫째도 슬그머니 옆에 와 앉아 귀를 기울였습니다. 학습지 앞에서 짜증을 내던 아이가, 동생 책 읽어주는 소리에 스스로 끌려온 겁니다.

환경이 아이를 움직입니다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이란 학습자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방법을 선택하며, 결과를 평가하는 학습 방식을 말합니다. 핵심은 아이 내면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동기는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먼저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배움이 즐거운 경험으로 남는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싹틉니다.

그날 일요일 아침, 저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학습지보다 강력했습니다.

구몬은 결국 얼마 후 그만뒀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그때 제가 불안했던 이유, 그리고 그 불안이 아이에게 어떻게 전달됐는지는 지금도 생각납니다. 아이의 공부 습관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은 "어떤 학습지를 시킬까"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배움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인 것 같습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