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갈 때마다 둘째가 달라집니다. 평소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다쟁이인데,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부끄럼쟁이가 됩니다. 같은 나이의 사촌이 말을 걸어도 시종일관 웃는 것으로만 대답합니다. 그러다 비행기에서 내려 호주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수다쟁이가 됩니다. 그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아이에게 호주가 진짜 집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아이에게 한국은 여행 가는 곳입니다
저에게 한국은 고향입니다. 태어나고 대학까지 졸업한 곳, 성장기의 추억들이 쌓인 곳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한국은 여행 가는 곳입니다. 1년에 한 번 가는, 친척들이 있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쓰이는 곳.
자주 왕래하지 못하는 한국 가족들과 만나는 시간이 쌓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어가 서툰 둘째는 또래의 사촌이 말을 걸어도 웃음으로만 답합니다. 대화를 이어갈 수 없으니, 무안함을 웃음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내가 더 일찍 더 많이 한국어를 가르쳤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옵니다.
호주로 돌아오면 둘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야기가 폭발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 학교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집에 돌아와서 하고 싶은 것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이에게 호주가 편안한 집이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이민자 부모로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그 당연한 사실이 마음 한쪽을 건드립니다.
이민자 가정 아동의 정체성 형성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출생지나 성장지가 아이의 심리적 고향(Psychological Home)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입니다. 부모의 출신국이 어디든, 아이가 언어와 관계와 일상을 쌓아온 곳이 아이에게 집이 됩니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발달 과정입니다. (출처: Australian Institute of Family Studies, 2022)
국자가 영어로 뭐더라
얼마 전 부엌에서 첫째에게 "국자 좀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국어를 못 알아듣기에 영어로 말해줘야 하는데, 국자가 영어로 뭔지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물건인데 단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가 직접 가지러 갔습니다.
그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눈곱, 코딱지처럼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영어로는 써본 적이 없는 단어들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괜찮았습니다. 대화가 단순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대화가 깊어질수록 영어로 내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커졌습니다.
특히 사춘기가 걱정됩니다. 감정적인 대화가 필요한 시기에 언어의 한계로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받아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나만 한국인으로서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민자 부모가 조용히 품고 사는 걱정 중 하나입니다.
다문화 가정 부모의 언어 불안(Language Anxiety)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이민자 부모들이 자녀와의 깊은 정서적 소통에서 언어 한계를 느낄 때 고립감과 자존감 저하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완벽한 언어 구사보다 감정적 진정성과 지속적인 소통 시도가 부모 자녀 관계에 더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도 함께 보고됩니다. (출처: Multicultural Mental Health Australia, 2022)
언젠가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아닐 거예요
아이들은 한국에도 출생신고가 돼 있습니다. 그래도 때가 오면 한국보다 호주를 택할 것이라는 생각이 큽니다. 가족도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으니까요. 저는 언젠가 한국에 돌아갈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매 순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둘째가 호주에 돌아와 수다쟁이가 되는 순간마다, 첫째가 호주 친구들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는 순간마다. 아이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기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이들이 편안한 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한국을 낯선 나라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국은 엄마의 고향이고, 외할머니가 있는 곳이고, 아이들의 뿌리 중 한 부분이니까요. 완전히 연결될 수는 없더라도,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그 줄을 잡고 있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이가 한국어를 못해서 한국 친척들과 소통이 어려울 때 어떻게 하나요?
억지로 대화를 강요하기보다 함께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음식 만들기, 산책, 놀이처럼 언어 없이도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오히려 더 깊은 연결을 만들어줍니다.
이민자 엄마로서 아이와 영어로 소통이 힘들 때 어떻게 하나요?
완벽한 영어보다 진정성 있는 소통이 더 중요합니다. 단어가 막힐 때 몸짓이나 그림으로 대신하거나, 아이에게 솔직하게 "엄마가 그 단어 지금 생각이 안 나"라고 말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 언어 배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이가 호주 정체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어떻게 하나요?
아이가 자란 환경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건강한 발달 과정입니다. 한국 문화와의 연결을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이가 호주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잡아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