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에게 혼자 뭔가를 맡겨본 적 있으신가요? 처음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고, 실패하면 어쩌나 싶어 결국 부모가 대신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준이에게 처음으로 혼자 심부름을 맡겼던 날, 솔직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준이에게도, 저에게도 작은 전환점이 됐습니다.
처음 혼자 심부름을 시킨 날
준이가 일곱 살 때였습니다. 집 근처 작은 슈퍼마켓에 우유를 사러 가야 했는데, 지안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깨우기도 그렇고, 안고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준이가 옆에 있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습니다. "준이야, 엄마 대신 슈퍼마켓에서 우유 하나만 사올 수 있어?"
준이 눈이 커졌습니다. 혼자 가도 되냐고, 정말이냐고 몇 번씩 확인했습니다. 저도 속으로는 걱정이 됐습니다. 길을 건너야 하는지,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어떻게 하는지, 돈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그래도 슈퍼마켓은 집에서 2분 거리였고, 길도 단순했습니다. 돈을 세어 손에 쥐여주고, 무슨 우유를 사야 하는지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보냈습니다.
기다리는 10분이 꽤 길게 느껴졌습니다. 창문 너머로 자꾸 내다봤습니다. 그러다 준이가 우유를 들고 씩씩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다녀왔어요!" 하는 목소리에 뿌듯함이 가득했습니다. 거스름돈도 정확하게 가져왔습니다. 준이 얼굴에는 뭔가 해냈다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준이는 달라졌습니다. 심부름을 시키면 귀찮아하기보다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달라졌습니다. 아이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제대로 알았습니다.
아동 발달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작은 책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경험이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의 신뢰를 받아 혼자 무언가를 해냈을 때, 아이는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내면의 믿음을 쌓아갑니다. 준이가 우유를 들고 돌아오던 그 표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출처: Raising Children Network Australia - Independence)
심부름이 독립심을 키웁니다
그 이후로 준이에게 조금씩 더 많은 것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 목록을 주고 직접 찾아오게 하거나, 식사 준비를 할 때 재료를 꺼내오게 하거나, 동생 지안이의 간식을 챙겨주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처음엔 실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브랜드의 물건을 사오거나, 지안이가 싫어하는 간식을 줘서 울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혼내기보다 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에서 자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부모님이 심부름을 자주 시키셨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 간장을 사러 가고, 이웃집에 뭔가를 전달하러 가고. 지금 생각하면 그 경험들이 저를 조금씩 독립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안전 문제로 아이 혼자 밖에 내보내는 것을 꺼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한국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초등학생도 혼자 마트를 못 가게 한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안전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도한 보호가 아이의 독립심 발달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호주에서는 아이의 독립심을 키우는 것이 육아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학교에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연습을 많이 시킵니다. 준이가 혼자 태권도 대회에 2박 3일을 다녀온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처음엔 걱정이 앞섰지만, 돌아온 준이는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신뢰를 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교육입니다
심부름을 시키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뭔가를 맡기는 것은 단순히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준이야, 네가 할 수 있다고 믿어. 그 메시지가 아이에게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닿습니다.
준이가 지안이에게 간식을 챙겨줄 때, 테이블을 세팅할 때, 마트에서 물건을 골라올 때. 그 작은 순간들이 쌓여서 지금의 준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9살이지만 아침에 혼자 등교 준비를 하고, 학교 준비물을 스스로 챙기고, 동생이 울면 먼저 달려가는 아이가 됐습니다. 거창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많이 믿어준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심부름이 성공적이었던 건 아닙니다. 거스름돈을 잃어버린 날도 있었고, 사오라고 한 것과 다른 것을 사온 날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실패하면 혼난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야, 다시 시도합니다. 심부름은 그 연습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는 아이의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충족될 때 내면의 동기가 자란다고 설명합니다. 심부름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율성, 해냈다는 유능감, 가족을 위해 기여한다는 관계성. 우유 한 팩을 사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