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 자존감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칭찬을 많이 해주고, 실패를 허용하고, 스스로 선택하게 해줘야 한다고. 그런데 직접 해보면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피곤한 날, 여유가 없는 날에는 칭찬보다 잔소리가 먼저 나오고, 기다리는 것보다 대신해주는 것이 더 빠릅니다. 아이 자존감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부모의 여유가 먼저라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여유가 없으면 자존감 교육이 불가능했습니다
준이와 지안이 육아가 가장 바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준이의 과외 활동이 한꺼번에 늘었고, 지안이는 이제 막 어린이집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태권도, 수영, 피아노 라이딩에 지안이 등하원까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 준비도 해야 했습니다.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아이들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돌아보면, 대부분 지시하고 재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빨리 먹어, 빨리 씻어, 빨리 자. 준이가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면 나중에라고 했고, 지안이가 울면 빨리 달래서 재우려 했습니다. 아이들의 감정이나 이야기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때 준이에게서 이상한 신호가 왔습니다. 뭔가를 시도하기 전에 엄마 이거 해도 돼요?를 자주 물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하던 것들도, 먼저 허락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제가 여유가 없던 시기에 준이의 선택들을 자주 막거나 고쳐줬던 것이 쌓인 것이었습니다. 빨리 하려다 보니 아이가 하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신해줬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준이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정서적 가용성(Parental Emotional Availability)은 아이의 자존감 발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부모가 심리적으로 여유 있는 상태에서 아이의 시도를 기다려주고 인정해줄 때, 아이는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효능감을 쌓습니다. 반면 부모가 소진된 상태에서 아이의 시도를 막거나 대신해주는 것이 반복되면, 아이의 자율성과 자존감 발달이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출처: APA - Parental Emotional Availability)
부모 여유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면서 과외 활동 일정을 줄였습니다. 준이의 피아노를 잠깐 쉬게 했습니다. 처음엔 아이 교육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일정에 여백이 생기자 저녁 시간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고, 준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느긋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지안이가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면 제대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잠든 후 30분,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조용히 차를 마셨습니다. 처음엔 이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쉬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30분이 다음 날 아이들 앞에 더 온전한 상태로 설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충전이 됐을 때와 안 됐을 때의 차이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준이가 요즘 많이 웃어요라고 말했을 때가 그즈음이었습니다. 제가 바뀐 것을 아이가 먼저 알아챘습니다. 준이의 해도 돼요? 질문도 줄었습니다. 스스로 꺼내서 그리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돌아왔습니다. 부모의 여유가 아이의 자율성을 되살렸습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는 아이가 자율성을 경험할 때 내적 동기와 자존감이 함께 발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율성은 부모가 심리적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부모의 여유가 아이의 자존감 발달의 토대가 됩니다. 아이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먼저 부모가 충전되어야 한다는 것, 순서가 그렇습니다. (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
여유가 있을 때 달라지는 것들
부모에게 여유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이제는 압니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준이가 천천히 신발을 묶는 것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안이가 혼자 옷을 입으려고 끙끙거려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막힌 수학 문제를 스스로 풀려고 할 때 곁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이 쌓여서 아이의 자기 효능감이 됩니다.
여유가 없는 날에는 그게 안 됩니다. 빨리 신겨주고, 빨리 입혀주고, 답을 알려줍니다. 그 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아이가 스스로 해낼 기회가 사라집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스스로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경험을 쌓지 못하게 됩니다.
완벽하게 여유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피곤한 날, 바쁜 날은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상태를 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엄마 오늘 좀 지쳐있어. 그러면 준이가 알아서 조심합니다. 상태를 숨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낫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이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거창한 교육 방법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자신을 돌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