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이가 시드니 태권도 대회에 처음으로 혼자 다녀왔습니다. 저와 남편은 일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고, 사범님과 형 누나들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떠났습니다. 밥을 직접 사 먹어야 했기 때문에 프리페이드 체크카드와 현금을 챙겨줬습니다. 잘 간수해야 한다고 몇 번 당부하고 조그만 가방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대회에 참석한 유치원 동기 부모님으로부터 사진과 함께 메시지가 왔습니다. 준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매점에 가서 군것질을 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매점을 인수할 기세"라는 말과 함께. 농담처럼 전해준 말이었지만, 저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직 첫날이었거든요. 이틀이 더 남았는데, 계획 없이 다 써버리는 건 아닐까. 다행히 돌아온 준이는 얼마를 남겨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도감보다 더 크게 남은 건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한 번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전거를 발로 찬 날, 새 자전거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준이가 사촌 형에게서 자전거를 물려받은 적이 있습니다. 새것은 아니었지만 쓸 만했습니다. 준이는 자전거 타기를 연습했는데, 뜻대로 잘 되지 않자 자전거 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따위 고물 자전거, 갖다 버려!" 그러면서 자전거를 발로 찼습니다. 그리고 새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주지 않았습니다. 자전거가 새것은 아니지만 기능은 충분히 하고 있으니 버릴 이유가 없다고, 처음 배우는 것이라 당연히 어렵고 연습하면 된다고 타일렀습니다. 준이는 투덜거렸지만 계속 연습했고, 지금은 자전거를 잘 탑니다. 돌아보면 그때 바로 사줬다면 새 자전거를 탔어도 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자전거가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예전의 저는 달랐습니다. 준이가 아기 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고 바로 사줬습니다. 좋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게에 갈 때마다 사달라고 하고, 안 된다고 하면 떼를 쓰는 게 반복됐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아이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아이에게 나쁜 습관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나 동생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갈 때 좋은 옷을 입혀야 한다고, 다른 아이들이 휴대폰이 있으니 없으면 무시당한다고 꼭 사줘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오히려 준이 어린이집에 보낼 때 일부러 오래된 옷을 입혔습니다. 밖에서 뛰어놀고 그림 그리다 보면 옷이 더러워지는 게 당연한데, 좋은 옷을 입혀 보내면 아이가 눈치를 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소비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는 순간, 아이는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남의 시선을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그게 더 걱정됩니다.
만족 지연(Delayed Gratification)이란 즉각적인 보상을 참고 더 큰 보상을 기다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마시멜로 실험으로 잘 알려진 이 개념은, 만족 지연 능력이 높은 아이들이 학업 성취도와 사회적 유능감이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전거를 바로 사주지 않은 그날, 저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준이에게 기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출처: APA, Psychological Science)
모노폴리 뱅커를 시킨 이유
우리 가족이 즐겨 하는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모노폴리입니다. 저는 일부러 준이에게 뱅커 역할을 맡겼습니다. 게임 중에 돈을 직접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연산 능력을 키우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다 보니 경제 개념을 가르칠 기회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준이는 처음에 비싼 땅은 무조건 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땅을 사고 나서 계속 렌트비를 받기 시작하자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물건을 살 때 가격만 따지는 게 아니라 그 가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옥션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준이가 갖고 싶은 땅이 나오자 무조건 가격을 올려불렀습니다. 그때 남편이 말했습니다. "옥션은 물건을 사는 게 목적이 아니야.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게 목적이야." 준이가 잠깐 멈추더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게임이 끝난 후에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 나서 알고 보니, 금융 전문가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취학 아동에게는 마트 놀이, 시장 놀이처럼 모의 화폐를 사용하는 놀이로 돈의 교환 개념을 먼저 익히게 하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는 현금으로 직접 용돈을 줘서 기회비용과 선택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노폴리는 그 모든 개념을 게임 하나로 녹여낸 셈이었습니다.
금융 교육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시기가 전전두엽이 발달하여 스스로 계획하고 의사결정하는 능력을 키우기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합
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금융 습관이 평생의 자산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게임 한 판이 어쩌면 학습지 한 권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출처: ASIC MoneySmart Australia)
이제 용돈 교육을 시작하려 합니다
시드니 대회에서 돌아온 준이를 보며 결심했습니다. 용돈을 주고 기입장을 쓰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작년 빅토리아 대회 때는 돈을 주지 않아 점심을 제대로 못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엔 챙겨줬는데, 결국 계획 없이 쓰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함께 가르쳐야 합니다.
현금으로 돈의 무게와 가치를 먼저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체크카드나 디지털 화폐는 돈이 나가는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시드니에서 준이가 체크카드로 매점을 드나든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손에서 직접 돈이 나가는 경험이 없으니 얼마가 남았는지 실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용돈 기입장을 쓰는 것도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자신이 돈을 어디에 썼는지 돌아보는 과정이고, 다음엔 어떻게 쓸지 스스로 계획하는 훈련입니다. 준이가 매점에서 군것질을 하며 쓴 돈을 직접 적어본다면, 다음 대회에서는 다르게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금융 교육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번 주부터 용돈을 현금으로 주고, 쓴 것을 적게 합니다. 그리고 모노폴리를 더 자주 꺼낼 생각입니다. 아이가 돈의 가치를 몸으로 먼저 배우는 것, 그게 어떤 금융 교과서보다 오래 남을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