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중학교 때까지 전교 상위권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성적이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 주변에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 저도 그 당사자였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했고 전교 1등도 여러 번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그 성적이 그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지금 제 아이를 키우면서, 그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습니다.
선행학습보다 깊이가 먼저입니다
혹시 "빨리 배우면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고 계신가요? 강남 대치동 학군에서도 이 방식이 얼마나 역효과를 내는지 이미 많이 목격됐다고 합니다. 개념 이해 없이 빠르게 진도를 뽑아둔 아이들이 결국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처음부터 다시 개념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행학습이란 학교 교육과정보다 앞서 내용을 미리 배우는 학습 방식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내용을 먼저 접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해가 자리 잡히기 전에 진도를 앞당기는 데 있습니다. 1%의 성공 사례가 있다고 해서 나머지 99%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보다 한 권을 읽고 어떤 질문을 스스로 던졌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독해력이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 책 50권을 빠르게 훑는 것보다 책 5권을 여러 번 읽고 스스로 질문하며 소화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훨씬 단단한 학습 기반을 만듭니다.
제가 아이의 숙제를 절대 도와주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 숙제를 항상 봐주셨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성적은 받았지만,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완성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게 나중에 자기 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태도로 이어졌다고 솔직히 느끼고 있습니다.
반면, 저는 가능한 아이가 처음부터 끝가지 알아서 하도록 합니다.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도와주되, 아이의 의견을 묻고 필요한만큼의 도움만 줍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하여 걸정하도록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는 부모가 되주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과제를 받아왔을 때 아이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의 눈으로 보면 미흡하지만, 절대 고쳐주려고 한적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흐뭇할 때가 많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갈리는 건 성적이 아니라 회복탄력성입니다
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1, 2등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 혹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중학교 내신 성적의 인플레이션 현상, 즉 점수가 전체적으로 높게 분포되어 실제 학력 격차가 숨겨지는 구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 후 등급 하락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하면서 더 크게 체감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부재입니다. 회복탄력성이란 실패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심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는 달리, 공부 범위도 넓고 한 번의 시험에서 실수가 등급에 직결되는 구조입니다. 이 압박을 견디는 힘이 없으면, 아무리 선행학습을 열심히 해온 아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회복탄력성은 어릴 때 실패를 경험하고 스스로 일어서본 경험이 쌓여야 길러집니다. 제가 아이가 혼자 만든 작품에서 어른 눈으로 보기에 미흡한 부분이 보여도 굳이 고쳐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완성본이야말로 자기 효능감을 키우는 재료가 됩니다.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란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신이 어떤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이 믿음이 높은 아이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합니다. 반면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교정해준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막히는 순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서 겪은 것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옆에서 믿고 지지해줄 어른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단, 여기서 지지란 감시나 지시가 아닙니다. "오늘 공부했어?"가 아니라 "요즘 어떤 게 재미있어?" 같은 오픈형 질문으로 아이가 스스로 생각을 꺼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자기주도학습, 혼자 앉혀두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주도학습이라고 하면 "알아서 혼자 하게 내버려두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이란 학습자가 자신의 목표와 방법을 스스로 결정하고 진행하는 학습 방식을 의미합니다. 핵심은 교수자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교수자가 수직적인 지시자에서 수평적인 지지자로 역할을 바꾸는 것입니다. 혼자 방에 앉혀두고 문 닫는 것은 독학(Self-study)에 가깝고, 그것만으로는 대부분 실패로 끝납니다.
자기주도학습으로 실제로 성적을 끌어올리려면 아래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맞아야 합니다.
- 학습 시간: 절대적인 시간의 확보. 말콤 글래드웰이 언급한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충분한 시간 없이는 어떤 전략도 의미가 없습니다.
- 전략: 장기·중기·단기 계획을 세워 무엇을 먼저 공부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과 효율적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 실행: 의지에 기대는 게 아니라, 공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가 있어도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흐지부지되기 쉽습니다.
- 성찰: 같은 방법을 반복하지 않고, 시험 후 목표·계획·실천·결과를 점검해 전략을 재수정하는 것.
특히 학과 습의 균형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여기서 '학(學)'이란 배우는 시간, 즉 수업이나 강의를 듣는 것을 말하고, '습(習)'이란 배운 것을 스스로 반복하고 체화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학과 습의 비율이 1:1 정도로도 충분하지만, 고등학교로 갈수록 습의 비중이 훨씬 커져야 합니다. 학원을 여러 개 다니면서 듣는 시간은 많은데, 스스로 소화하는 시간이 없는 구조라면 아무리 좋은 강의도 쌓이지 않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 학원도 많이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열심히 들었지만, 혼자서 터득하는 시간은 충분히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실제로 학습 성취도는 습 시간과 직결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분산 학습(Spaced Repetition) 효과를 다룬 연구들에 따르면, 학습한 내용을 일정 간격을 두고 반복할 때 장기 기억 전환율이 40% 이상 높아집니다(출처: 교육부).
피드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피드백은 기본적으로 받는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내용뿐만 아니라 방식이 중요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두고, 외부 기준이 아닌 아이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평가받는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외적 보상보다 내재적 동기를 강화하는 방식이 지속적인 학습 참여와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마음을 꺼낼 수 있게 기다려주는 것, 지금 제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입니다. 지금 당장 앞서가는 것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일어서는 힘을 갖추는 것이 훨씬 더 오래, 멀리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스케줄 중 '습'에 해당하는 시간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한번 들여다보시는 것도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