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시간이 없었다는 한 치과의사의 고백이 SNS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도 어쩌면 지금 아이에게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행을 간 사촌이 맡기고 간 기니피그를 먼저 돌보겠다는 아이에게 학습지를 먼저 끝내라고 나무란 일이 생각납니다. 기니 피그를 책임감 있게 돌보자고 한 아이의 마음을 살펴주는 대신, '공부 강요'를 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아이의 꿈을 응원한다면서, 실은 불안했습니다
저희 아이는 꿈이 참 많습니다. 고생물학자, 태권도 선생님, 우주비행사. 게다가 그 꿈들을 이어붙인 계획도 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고생물학을 연구하고, 40대에 귀국해 태권도를 가르치며 또 다른 꿈을 찾겠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도 어릴 때 저랬으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웃음 뒤에 불안이 있었습니다. 주변 아이들이 학습지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어떤 학원을 다닌다는 얘기가 들리면 슬그머니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결국 친구 아이가 한다는 학습지를 저도 권유했고, 아이는 흔쾌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속뜻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제가 왜 학습지 하겠다고 했는지 알아요? 안 한다고 하면 엄마가 실망할 것 같았어요."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배움의 필요를 느껴서가 아니라, 저를 기쁘게 하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의 함정입니다. 외재적 동기란 상이나 칭찬, 타인의 기대처럼 자신 바깥에서 오는 자극에 의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동기는 그 자극이 사라지면 행동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릴 때부터 공부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 습관이 아이 스스로의 필요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매일이 전쟁이 됩니다. 실제로 학습지를 시작한 이후 저는 매일 아이를 달래고, 혼내고, 어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 시간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공부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함께 앉는 것이 더 강했습니다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이라는 말을 교육 관련 글에서 자주 접합니다. 자기주도학습이란 학습자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선택하며, 결과를 평가하는 학습 방식을 뜻합니다. 학원이나 학습지가 아닌 아이 내면의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개념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저는 아주 우연한 순간에 목격했습니다. 제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작은 아이가 와서 영어 공부 앱을 켜달라고 했습니다. 큰 아이는 읽고 싶다던 책을 가져와 옆에 앉았고, 남편도 공부하던 어학 교재를 펼쳤습니다. 아무도 "공부해라"는 말을 하지 않은 오후였는데, 가족 넷이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것이 어떤 학습지보다 강력한 장면이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10세 이전 아동의 경우 충분한 신체 활동이 인지 발달과 직결된다고 밝혀져 있습니다(출처: Harvard T.H. Chan School of Public Health). 이 시기에 뇌 가소성(Brain Plasticity)이 가장 높게 유지됩니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경험과 자극에 반응하여 신경 연결을 만들고 변형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즉, 이 시기에는 앉아서 연산 문제를 푸는 것보다 뛰어노는 것이 두뇌 발달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아이의 배움이 즐거운 경험으로 남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 저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모노폴리 게임을 하며 돈 계산을 익히고, 주사위를 굴리며 확률 감각을 키웠던 저희 아이가 학습지 연산보다 훨씬 빠르게 셈을 배운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부모로서 점검해볼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가 공부를 시작하는 이유가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확인한다.
- 부모가 먼저 학습하는 모습을 생활 속에서 보여준다.
- 미취학 아동에게는 실외 활동과 놀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다.
- 아이의 관심사와 꿈을 먼저 묻고, 그것을 중심으로 동기를 연결한다.
아이의 자립심을 믿는다는 것
저는 어릴 때 부모님 의존도가 높은 아이였습니다. 숙제도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저의 자립심 발달을 늦췄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면 쉽지 않고, 남편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입니다. 제가 겪어온 것이 있다 보니, 아이들 숙제는 일부러 봐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혼자 해결하라고 두니 아이들이 스스로 방법을 찾더라고요. 틀려도 제 힘으로 해낸 숙제를 오히려 더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메타인지(Metacognition)와 연결됩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능력은 누군가 대신 풀어줄 때가 아니라 스스로 막히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에서 길러집니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과도한 학습 개입은 오히려 아이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됩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자기효능감이란 스스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업 성취와 직결되는 심리적 기반입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될 세상은 지금의 기준으로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AI가 직업 지형을 빠르게 바꾸고 있는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떤 학원을 다니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고 결정하는 힘을 갖추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힘은 부모가 대신 결정해줄 때가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며 버팀목이 되어줄 때 길러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결국 저도 여전히 연습 중입니다. 주변 소식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가 고생물학자에서 태권도 선생님으로 또 다른 꿈으로 넘어가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라는 것을 기억하려 합니다. 공부는 의지가 생겼을 때 늦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태도는 어릴 때부터 쌓아가야 합니다. 아이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믿어주는 사람이 부모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제가 매일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다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