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곧잘 읽던 아이가 어느 순간 책을 손에 들지 않을 때, 부모는 당황합니다. 억지로 읽히면 더 싫어할 것 같고, 그냥 두면 영영 안 읽을 것 같은 불안이 생깁니다. 준이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독서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책을 안 읽기 시작했습니다
준이가 7살 무렵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척척 읽고, 잠자리에서도 더 읽어달라고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책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 가도 골라오는 책 수가 줄었고, 가져온 책도 펼치지 않고 반납하는 날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기다렸습니다. 슬럼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요즘 책을 안 읽냐고 물었더니 준이가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책이 없어요. 그 말이 단서였습니다.
그 시기를 돌아보니 제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 준이 대신 골라오는 경우가 늘었던 것이 보였습니다. 바쁘다 보니 빨리 빌리고 나오려다가, 준이가 직접 고르는 시간을 줄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른 책들이 제 기준에서 좋은 책들이었지, 준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는 책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준이에게 맞는 책이 아니라 제가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 책들이 쌓인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독서 동기 연구에서는 책 선택의 자율성이 독서 지속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스스로 고른 책을 읽을 때 아이는 더 오래, 더 깊이 읽습니다. 반면 부모나 교사가 고른 책을 읽어야 할 때 독서가 의무처럼 느껴지고, 지속하기 어려워집니다. 준이가 책을 끊은 이유가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출처: National Literacy Trust - Reading Choice and Motivation)
선택권을 돌려주자 달라졌습니다
주말에 도서관에 함께 갔습니다. 이번엔 제가 아무것도 고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준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고르게 했습니다. 준이가 처음 가져온 것이 Anh Do의 그래픽 소설이었습니다. 글보다 그림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더 글이 많은 책을 권했겠지만, 그냥 뒀습니다.
집에 와서 준이가 그 책을 바로 펼쳤습니다.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다음 권도 빌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는 David Walliams 책으로 넘어갔습니다. 스스로 독서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제가 유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택권이 생기자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그 이후로 도서관에서의 역할을 바꿨습니다. 준이가 책을 고르는 것을 지켜보고, 제가 흥미로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책은 그냥 옆에 놓아두는 정도로만 했습니다. 선택은 준이가 하게 했습니다. 빌려온 책을 읽지 않아도 다음에 다른 책을 고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책 자체에 대한 부담도 줄었습니다.
또 하나 바꾼 것이 있었습니다. 잠자리 독서를 제가 먼저 책을 꺼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거 읽어줄게라고 하면, 준이가 관심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했습니다.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다른 책을 꺼냈습니다. 읽어야 해가 아니라, 오늘 이 책이 재미있어 보여서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니 준이도 자연스럽게 같이 보게 됐습니다.
책을 끊는 시기가 또 올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 준이의 독서가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를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올 정도로 빠져들었고, 집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시기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게임에 빠지거나,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는 시기가 오면 책이 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독서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다르게 잡았습니다. 매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책이 항상 주변에 있고 언제든 손이 닿을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 책을 안 읽는 시기가 와도 책 자체를 싫어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장기적으로 독서 습관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 경험에서 배웠습니다.
지안이는 아직 그림책 단계입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냥 읽어줍니다. 몇 번째인지 세지 않습니다. 그 반복이 지안이에게 책이 즐거운 것이라는 감각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준이가 그랬던 것처럼, 지안이도 그 감각에서 출발해서 스스로 독서의 세계를 넓혀갈 것입니다. 억지로 읽히지 않아도, 책이 좋다는 감각이 있으면 결국 돌아옵니다.
독서 발달 연구에서는 독서 슬럼프가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슬럼프 시기에 독서를 강요해서 책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환경을 유지하고 선택권을 주면서 기다리는 것이 슬럼프를 가장 빠르게 지나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출처: Reading Rockets - Reading Slum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