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학습지, 정말 지금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9살 첫째에게 작년부터 구몬 학습지를 시켰는데, 시작하고 나서 매일 같은 고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니피그를 책임감 있게 돌본 아이에게 칭찬 대신 "학습지 안 했잖아"라는 말부터 했습니다. 아침마다 책 읽으며 밥 먹던 아이를, 이제는 "빨리 먹고 학습지부터 해"라고 재촉합니다. 학습지를 시작한 뒤로 아이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정작 중요한 관계는 금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 학습지가 무너뜨린 관계와 독서 시간
초등 시기의 사교육비 지출은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초등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약 43만 원에 달하며, 이는 10년 전 대비 35% 이상 증가한 수치입니다(출처: 통계청). 여기서 사교육비란 학원, 학습지, 과외 등 공교육 외에 부모가 자녀 교육을 위해 지출하는 모든 비용을 의미합니다.
저 역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구몬 안 시키면 뒤처진다"는 말을 듣고 작년에 시작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학습지를 시작하면 아이가 공부 습관을 잡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이와 제가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됐습니다.
특히 아침 시간이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밥 먹으며 책 읽는 모습이 기특해서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습지 안 하면 그날 못 한다"는 규칙 때문에 아이를 계속 다그치게 됩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아이에게 학습지부터 하라고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맞는 건가 싶습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이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20분 뒤에 학교를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기니피그를 먼저 챙겼습니다. 케이지 청소를 하고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보며 칭찬해줘야 했는데, 저는 "학습지 안 했으니 게임기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기니피그 청소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며 신경질을 냈고, 결국 게임기 없이 학교에 보냈습니다. 뒤돌아서니 후회만 남았습니다.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정서적 안정감(emotional security)'이란 아이가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다고 느끼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초등 시기는 이 정서적 안정감이 가장 중요하게 형성되는 시기인데, 학습지 때문에 이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학습지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유한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까지 소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친한 언니의 아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무기력해진 사례를 봤는데, 언니는 "어릴 때 너무 많이 시켜서 그런 것 같다"고 후회했습니다. 아이도 언니도 모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초등 시기에 관계를 다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선행보다 중요한 것은 문해력과 여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2024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등 고학년의 약 23%가 기본적인 문해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여기서 문해력(literacy)이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종합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제가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아이가 책 읽는 시간을 빼앗아가며 학습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지문이 읽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저는 지금 그 반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교육 트렌드를 보면 선행학습(advanced learning)에 대한 열기가 과도합니다. 선행학습이란 학년보다 앞선 내용을 미리 배우는 것을 말하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초등 입학 전부터 수학 선행을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영재교육원(영유)에 가기 위한 레벨 테스트를 준비하는 학원까지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학원을 가기 위한 학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달라졌습니다. 저는 영재교육원도, 레벨 테스트 준비 학원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들이 필수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우리 아이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정의 경제력도 아이의 에너지도 유한합니다. 초등 때 모든 걸 다 써버리면 정작 중고등학교에서 힘을 낼 수 없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학습지를 시작하면 아이가 공부를 좋아하게 될 거라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되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등 때는 관계를 단단히 쌓는 시기라는 것
- 선행보다 독서를 통한 문해력 형성이 우선이라는 것
- 유한한 시간과 경제력을 적기에 쓸 수 있도록 아껴야 한다는 것
지금 제가 학습지를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가 책 읽는 시간을 지키고,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학습지 몇 장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건 지금 당장의 선행이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낼 수 있는 토대였습니다. 그 토대는 부모와의 단단한 관계, 책을 통해 쌓은 문해력, 그리고 아직 소진되지 않은 에너지입니다. 저는 이제라도 방향을 바꿔보려 합니다. 아이가 아침마다 책 읽으며 밥 먹는 시간을 다시 돌려주고, 기니피그를 돌보는 책임감을 칭찬해줄 수 있는 엄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학습지는 잠시 멈추고, 아이와의 관계부터 회복하는 게 지금 제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