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저는 시합장에 없었습니다. 일 때문에 준이를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옆에서 응원하는데, 저희 아이만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준이는 씩씩하게 들어갔습니다.
시합이 끝나고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패턴과 스파링에서 각각 2등과 3등을 했다고. 저는 일단 "수고했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 기분을 살폈습니다. 전화 너머로 아이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를 탓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준이는 패턴 경합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함께 경합하던 아이가 실수를 했는데, 그 바람에 자신도 패턴을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있었습니다. 그 아이만 아니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명확하게 탓했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연습했다면 옆에서 누가 실수를 해도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결국 준비가 부족했던 건 자기 자신이 아니었냐고.
꾹 참았습니다.
대신 그냥 들었습니다. 억울했겠다, 그랬구나, 얼마나 당황했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준이가 스스로 말했습니다. "다음엔 더 열심히 연습해서 잘할 거예요."
제가 하려던 말을 아이가 스스로 했습니다.
참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 이유
그 말이 제 입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아이는 방어적이 됐을 겁니다. 억울한 감정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네 탓도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반성보다 반발이 먼저 나옵니다. 저도 어릴 때 그랬으니까요.
아이가 스스로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그건 진짜 자기 생각이 됩니다. 부모가 심어준 교훈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꺼낸 다짐입니다. 그 차이가 크다는 걸 그날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여기서 자기조절학습(Self-Regulated Learning)이라는 개념을 짚고 싶습니다. 자기조절학습이란 학습자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목표를 수정하며,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능력은 부모나 교사가 답을 알려줄 때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험이 쌓일 때 길러집니다. 준이가 그날 스스로 "더 열심히 연습하겠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 과정이었습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2등을 받아온 아이에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망하지 않은 건, 사실 결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혼자 시합장에 나가서 끝까지 했다는 것,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억울함을 털어내고 스스로 다음을 생각했다는 것. 그게 2등보다 훨씬 값진 일이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아이와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패턴을 더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연습해야 한다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연습을 더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었습니다.
준이는 그 이후 연습량을 스스로 늘렸습니다. 더 하라고 다그치지 않았는데, 아이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번에 더 큰 대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번보다 훨씬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실패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아이를 만듭니다
아이가 실패했을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교훈을 꺼내는 것, 아니면 일단 옆에 있어주는 것. 저는 오랫동안 전자가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패에서 뭔가를 배워야 다음이 있다고, 그걸 짚어줘야 부모 역할을 한다고.
그런데 태권도 시합 그날, 제가 참고 기다렸을 때 아이가 스스로 결론을 냈습니다. 제가 말했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다짐이, 아이 입에서 나왔습니다.
실패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가 아이의 회복탄력성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태도가 꼭 무언가를 해주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시간을 주는 것. 그것도 충분한 태도입니다.
준이의 다음 시합이 기대됩니다. 결과가 어떻든, 그날도 저는 아이 이야기를 먼저 들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