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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잊어가는 아이를 보며 느낀 것 — 언어·정체성·선택

by jamieseo1999 2026. 6. 25.

이중 언어 사용
이중 언어 사용

어느 날 준이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준이가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서툴러도 한국어로 대답하려 했는데, 그날은 아예 영어로 넘어갔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한국어를 잃어버리는 것 아닐까, 그게 괜찮은 일인가.

한국어가 조금씩 밀려나는 것을 봤습니다

준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하루 종일 영어를 쓰고 돌아오는 아이에게 한국어는 점점 집에서만 쓰는 언어가 됐습니다. 처음엔 한국어로 말하다가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영어 단어를 끼워 넣더니, 나중엔 아예 영어 문장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감정을 표현할 때였습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흥분됐을 때, 준이는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했습니다; "I'm so frustrated, it's not fair.". 한국어로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불편해진 것 같았습니다. 언어가 감정과 연결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조급했습니다. 더 많이 한국어로 말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어로만 대답하라고 강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이가 오히려 더 한국어 쓰기를 피했습니다. 억지로 시키면 더 멀어진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계승어(Heritage Language) 연구에서는 이민자 가정 아이들이 주류 언어 환경에서 성장할 때 가정 언어가 점진적으로 약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언어 교체(Language Shift)라고 하며, 특히 학교 입학 후 또래 집단의 영향이 커지는 시기에 가속화됩니다. 이를 막으려는 강압적 시도보다 긍정적 동기를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출처: TESOL International - Heritage Language Maintenance)

잃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킬 것을 골랐습니다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꿨습니다. 준이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호주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영어가 주 언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 오히려 준이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습니다.

 

대신 무엇을 지킬지를 골랐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어를 쓰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년에 한번씩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한국에 가는데,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꼭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야 한다'는 강요와 규칙 보다 할머니와 대화해야 한다는 이유가 준이가 한국말을 잊지않게 해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어가 즐거운 경험과 연결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음식을 만들 때 재료 이름을 한국어로, 한국 노래를 같이 들을 때, 한국 방문에서의 기억을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 한국어가 의무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들과 연결되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제가 일관되게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준이가 영어로 대답해도 저는 한국어로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완벽한 이중 언어보다, 한국어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잃어가는 것과 남는 것

솔직히 말하면 준이의 한국어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어휘가 제한적이고, 복잡한 표현을 한국어로 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할머니와 통화할 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한국에 가면 일주일 만에 다시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준이가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감의 일부가 됐습니다. 이중 언어를 쓰는 것은 이곳에서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지금은 아이가 완벽한 한국어를 하게 되길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잃어가는 것을 보며 느꼈던 조급함을 느끼는 대신, 아이가 한국어를 쓰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좋아하는 할머니와 이야기 하고, 한국에 가서 사촌동생들과 놀기 위해, 한국 음식이름을 아는 것, 좋아하는 만화를 한국어로 듣는 것 등 즐거운 경험들을 쌓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중 언어 발달 연구에서는 계승어가 완전히 유지되지 않아도, 부분적인 유지가 아이의 문화 정체성과 인지 유연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언어의 완성도보다 그 언어와 맺는 정서적 관계가 장기적인 유지에 더 중요한 변수입니다. (출처: TESOL International - Bilingual Identity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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