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첫째가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어느 사람인지 알아? 1/3은 한국인, 1/3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1/3은 호주인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가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아이는 혼란스러워하는 대신 그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대견함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우리 집은 1/3씩 나뉩니다
저희 가정은 다문화 가정입니다. 엄마인 저는 한국인, 남편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이지만 호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두 아이 모두 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세 개의 문화 배경을 동시에 가진 채 자라고 있습니다.
다문화 정체성(Multicultural Identity) 연구에 따르면 두 개 이상의 문화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은 부모가 각 문화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부모가 문화적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복수의 정체성을 혼란이 아닌 강점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처: Australian Multicultural Foundation, 2022)
1/3씩 나눠 자신을 설명한 아이의 말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자신이 가진 세 가지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오픈 마인드로 자신의 배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아이가 참 대견했습니다.
한국어 교육,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엄마 나라의 언어를 이해해주기를 원해서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어 학습책과 이야기책을 잔뜩 가져왔습니다. "엄마는 한국어만 쓸 거야"라고 매번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남편이 있는 시간이 되면 그러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온 가족이 모이는 저녁 시간에 한국어로만 대화하면 남편이 소외될까 봐 걱정이 됐습니다. 영어로 해야 온 가족이 함께 소통할 수 있고요. 그렇게 저녁마다 영어로 이야기하다 보면 한국어 사용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5살인 둘째는 한국어를 거의 못합니다. 한국어로 말을 걸면 영어로 대답하고, 못 알아듣겠다며 짜증을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일찍, 더 꾸준히 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바쁜 일상에서 아이들이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영어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솔직히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외할머니 손짓 발짓, 그 2~3주가 달라진 이유입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은 꼭 한국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한국과 친숙해지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제 친정어머니, 아이들의 외할머니 집에 머뭅니다. 어머니는 영어를 잘 못하십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한국어로만 대화하십니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해도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주십니다. 그 모습이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2~3주를 그렇게 보내고 호주에 돌아오면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 이름을 말하며 "엄마, 멸치조림 만들어주세요", "엄마, 계란볶음밥"이라고 시키지 않아도 한국어로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기회가 되면 더 자주, 더 오래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 습득 연구에 따르면 이중 언어 환경의 아이들에게 단기 집중 언어 몰입 경험은 장기적인 언어 능력 유지에 유의미한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특히 조부모처럼 해당 언어를 유일한 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원어민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아이의 언어 동기와 정서적 연결감을 동시에 높인다고 보고합니다. (출처: TESOL International Association, 2023)
돌아오면 다시 줄어들고, 그래도 이어가려 합니다
한국에서 늘어난 한국어 실력은 학교에 돌아가면 다시 줄어듭니다. 영어로 배우고,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한국어를 잊을지도, 한국 문화를 낯설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엄마인 제가 한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을 방문할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한국과의 연결을 끝까지 놓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방향은 알고 있습니다. 멸치조림, 계란밥이 먹고 싶다며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계속 들려오게 하고 싶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다문화 가정 아이가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각 문화를 부정하거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가진 여러 배경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정에서 각 문화를 긍정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한국어를 유지시키는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한국 방문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한국어만 사용하는 조부모와의 시간이 아이의 언어 동기와 실력을 동시에 높여줍니다. 방문이 어렵다면 한국어 영상, 한국어 책 읽기, 화상 통화 등을 꾸준히 병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서 한국어를 쓰려고 해도 잘 안 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온 가족이 모이는 시간보다, 엄마와 아이 둘만 있는 시간을 한국어 시간으로 정해두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짧더라도 매일 한국어로 대화하는 루틴이 없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