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55분이 됐습니다. 사무실 곳곳에서 가방을 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 "Handbag Time!"이라고 외쳤고, 5시 정각에 사무실은 텅 비었습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야근이 당연했던 환경에서 자란 저에게 호주의 문화는 낯설고 때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충격들이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이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칼퇴근이 육아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밤 10시 퇴근이 흔하고, 아이는 친정 엄마가 대신 봐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주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주에서는 퇴근 시간이 되면 모두가 가방을 쌉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오히려 상사나 팀장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고, 일반 직원들의 퇴근 시간을 침해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처음엔 이 문화가 낯설어서 마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이 야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일 와서 마저 하라고 했습니다. 한국식으로 눈치를 봤는데,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문화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칼퇴근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제시간에 픽업할 수 없습니다. 야근하는 동료에게 미안해하거나 상사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아이를 직접 데리러 갈 수 있게 해줍니다. OSHC(방과후 돌봄)를 이용하는 날도 있지만, 일찍 데리러 갈 수 있는 날에는 그렇게 합니다. 그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호주 워킹맘으로서 가장 감사한 부분입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호주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약 1,695시간으로, 한국의 약 1,901시간보다 200시간 이상 적습니다. 이 차이가 단순히 일을 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호주에서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됐습니다. (출처: OECD - Hours Worked, 2023)
[이미지: 부모가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모습]
무릎 꿇고 설명해준 상사, 그리고 아이에게 전달된 것
입사 초기에 상사가 업무를 설명해줄 때 제 자리 옆에서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르면 서서 메모장을 들고 받아 적는 수직적인 분위기가 당연했는데, 그 장면이 충격이었습니다.
여기서 평등주의(Egalitarianism)란 직급이나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호주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이 문화는 직장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선생님이 아이 눈높이에 앉아 이야기하는 방식이 낯설었는데, 직장에서 먼저 그 문화를 경험하고 나서야 학교 문화도 이해가 됐습니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저로서는 쉽게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수평적인 관계가 당연한 환경에서 자란다면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윗사람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을 훨씬 편안하게 여기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첫째가 선생님에게 모르는 것을 당당하게 질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환경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파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밥 먹었어?
한국식 행동이 호주 동료들에게 낯설게 보였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독감 기운이 있어 출근을 못 하게 됐을 때, 팀원들에게 메신저로 오늘 아파서 출근 못 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장문의 사과 글을 보냈습니다. 호주 동료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아픈 건 네 잘못이 아닌데 왜 미안하다고 해? 그냥 푹 쉬어, 라고 했습니다. 아플 때 연차를 쓰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직에 피해를 줄까 봐 미안해하는 한국식 책임감과 눈치 문화가 꽤 독특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밥 먹었어?라는 인사말도 오해를 낳았습니다. 호주 친구들에게 습관적으로 Did you have lunch?라고 물으면, 처음엔 밥을 사주겠다는 뜻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는 제안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냥 안부를 묻는 한국식 인사말이라고 설명하자, 상대방의 끼니와 건강을 먼저 챙기는 한국의 정(情) 문화라며 흥미로워했습니다.
이 두 에피소드를 아이에게 이야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챙긴다고요. 아이가 호주에서 자라면서 자
연스럽게 익히는 문화와, 엄마가 가진 한국식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으면 했습니다. 어떤 것이 맞고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아이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상점이 일찍 닫히는 이유를 알고 나서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가장 불편했던 것 중 하나가 상점들이 오후 5~6시면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밤 9시, 10시에도 카페가 열려 있고 새벽까지 배달 음식을 시킬 수 있습니다. 퇴근하고 장은 언제 보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도 퇴근 후 가족과 저녁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였습니다. 밤늦게 소비하는 삶 대신, 일찍 퇴근해 공원에서 가족과 바비큐를 하고,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뛰어놀고, 저녁 6~7시에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일상. 그것이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 문화가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가족이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이 생겼고, 그 시간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편의성보다 가족과의 시간을 우선시하는 호주의 가치관이, 결국 육아에서도 중요한 것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주에서 사는 것이 고마운 순간 중 하나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호주에서 워킹맘으로 살기 어렵지 않나요?
칼퇴근 문화와 OSHC 같은 방과후 돌봄 시스템 덕분에 한국보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가 수월한 편입니다. 야근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호주 직장 문화에 적응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수평적인 관계와 칼퇴근 문화에 익숙해지는 데 1~2년 정도 걸렸습니다. 처음엔 눈치를 보다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 문화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