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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한국 명절 지키는 이유 — 정체성·문화·뿌리

by jamieseo1999 2026. 5. 20.

호주에서 한국 명절 지키는 이유
호주에서 한국 명절 지키는 이유

설날 아침, 호주 집 거실에서 차례상을 차렸습니다. 남편은 처음엔 이게 뭔지 잘 몰랐고, 아이들은 왜 절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한국 음식 냄새가 집 안에 퍼지고, 서툰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게 번거롭고 어색해도,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아무도 안 하는데 왜 우리만 하냐고 물었습니다

준이가 여덟 살 때였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제가 한국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준이가 옆에서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친구들은 아무도 이런 거 안 하는데 왜 우리는 해요?" 그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나이였으니까요.

저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준이는 반은 한국 사람이고 반은 호주 사람이잖아. 그 두 가지가 다 준이 거야. 한국 명절을 지키는 건 그 절반을 잊지 않으려는 거야." 준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대화를 하고 나서 준이가 명절 준비를 귀찮아하지 않게 됐습니다. 오히려 떡을 빚는 것을 도와달라고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호주에서 한국 명절을 지키는 것은 번거롭습니다. 한국 식재료를 구하러 한인마트까지 가야 하고, 남편은 왜 이 날은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차례를 지낼 때 절하는 방식을 설명하다 보면 문화의 차이를 새삼 느낍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문화 정체성 연구에서는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원문화(heritage culture)와 연결된 경험이 있을 때 정체성 혼란이 줄어들고 심리적 안정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명절, 음식, 언어처럼 반복되는 문화적 경험이 아이에게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쌓아준다고 강조합니다. (출처: Multicultural Mental Health Australia)

남편이 한국 명절을 좋아하게 된 이유

처음엔 남편이 명절을 낯설어했습니다. 차례 음식이 많고, 절을 하는 방식도 생소했고, 왜 특정 날에 특정 것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했습니다. 설명을 해줘도 문화적 배경이 없으니 완전히 와닿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습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잡채, 전, 식혜.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지금은 명절이 오면 어떤 음식을 만들 거냐고 먼저 물어봅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만드는 시간을 즐깁니다. 준이가 전을 뒤집는 것을 배우고, 지안이가 반죽을 만지며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이 시간이 단순한 음식 준비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설날엔 남편이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줬습니다. 처음엔 어색하게 흉내를 냈는데, 지금은 제법 자연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절을 하고 일어나면 용돈을 주며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한국어로 말합니다. 발음이 어색해도 그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장면이 저는 좋습니다.

명절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

지안이는 아직 명절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특별한 음식이 나오고, 한복을 입고, 엄마가 바쁜 날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매년 반복되는 경험이 쌓이면, 언젠가는 그 의미를 스스로 알게 될 테니까요.

준이는 이제 추석이 되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자랑합니다. 어제 한국 명절이었는데 이런 음식을 먹었다고, 한복이라는 옷을 입었다고. 처음엔 다르다고 느꼈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 변화가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호주에서 한국 명절을 지키는 것이 거창한 교육이 아닙니다. 일 년에 몇 번, 함께 음식을 만들고 절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반복이 아이들에게 너는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줍니다. 그 감각이 나중에 아이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하나의 답이 되어줄 거라고 믿습니다.

이민 가정 아이들의 정체성 발달을 연구한 존 베리(John Berry)의 문화 적응 이론에서는 원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모두 유지하는 통합(Integration) 방식이 심리적 안녕감에 가장 긍정적이라고 합니다. 한국 명절을 지키면서 동시에 호주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건강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Journal of Cross-Cultural Psychology - Berry Acculturation 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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