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저녁, 책가방을 열었습니다. 알림장에 가득할 숙제 목록을 예상하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온 것은 얇은 그림책 두세 권이 전부였습니다.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게 다야?' 싶었는데, 그게 진짜 다였습니다. 호주 초등학교 숙제 문화, 처음엔 천국인 줄 알았다가 불안해지고, 결국 나만의 타협점을 찾기까지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학년엔 그림책, 고학년엔 자율 미션
호주 초등학교 저학년(Prep~2학년) 숙제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홈 리딩(Home Reading)입니다. 여기서 홈 리딩이란 학교에서 빌려온 그림책을 집에서 부모 앞에서 소리 내어 읽고, 부모가 리딩 다이어리에 사인해주는 방식의 일일 독서 과제를 말합니다. 매일 10분이면 충분합니다. 가끔 사이트 워드(Sight Words, 자주 쓰이는 영어 단어를 통째로 외우는 카드)가 추가되는 정도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조금씩 해서 아이가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Reception을 마칠 즈음 혼자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다 떼고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인데, 호주는 달랐습니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걱정이 돼서 선생님께 알파벳과 읽기를 미리 시켜야 하냐고 여쭤봤더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본인 이름만 쓸 줄 알면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Reading Eggs라는 앱으로 조금씩 익혀서 보냈습니다. 7월에 입학하는 둘째도 지금 같은 앱으로 알파벳과 파닉스를 익히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익혀두면 학교에서 따라가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요.
고학년(3학년~)이 되면 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는데,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올해 Year 4인 첫째의 일주일 숙제는 사실상 30분이 전부입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부모가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과제 노트에 그날 할 것을 적고 확인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독서 20분, 수학 문제 풀기, 집안일 돕기 같은 자율적인 미션들이 섞여 있습니다. 한 학기에 한두 번, 특정 주제로 포스터를 만들거나 PPT를 준비해 발표하는 프로젝트 숙제가 있긴 하지만, 밤을 새워야 하는 수준은 전혀 아닙니다.
호주 교육연구위원회(ACER)의 연구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경우 과도한 숙제가 학업 성취도와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학습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고 보고합니다. 호주 학교들이 의도적으로 숙제를 최소화하는 것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교육 철학입니다. (출처: Australian Council for Educational Research)

제 마음이 바뀐 3단계
숙제 없는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 제 마음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였습니다. 아마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1단계는 환희였습니다. 오후 3시에 하교하면 숙제 압박이 전혀 없으니, 아이와 손잡고 공원에 가서 마음껏 뛰어놀고 자전거를 탔습니다. 잔소리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이 교육 때문에 호주로 이민 온 한국 부모님들의 이유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좀 더 아이답게, 공부보다 자연 속에서 자율적으로 키우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2단계는 불안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니 슬슬 한국인 DNA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매일 놀기만 했습니다. 학교에서 글자는 제대로 배우고 있는 건지, 수학 진도는 나가는 건지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사고력 수학 학원, 영어 유치원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3단계는 현실 자각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호주 학교는 학습의 강제권을 완전히 가정으로 넘긴 구조였습니다. 학교에서 안 시키니, 결국 집에서 엄마가 따로 시키느냐 아니면 호주식 흐름을 믿고 가느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저도 타협점을 찾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구몬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NAPLAN
Reception과 Year 1 때는 아무것도 따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학교, 같은 나이의 사촌이 집에서 책을 사서 따로 공부를 시키는 것을 봤습니다. 다른 학부모들에게 물어보니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Year 3이 되면서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NAPLAN(National Assessment Program — Literacy and Numeracy)이란 호주 전국의 3, 5, 7, 9학년 학생들이 치르는 표준 학력 평가 시험으로, 읽기·쓰기·수학 능력을 측정합니다. 한국의 학업 성취도 평가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Year 3에 첫 NAPLAN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아이에게 따로 준비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APLAN 교재로 공부를 해봤는데, 일을 병행하면서 매일 아이 공부를 봐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구몬 학습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수영, 태권도 같은 예체능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2023년 NAPLAN 결과 기준으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학생들의 평균 읽기 및 수리 능력은 전국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상위 20%와 하위 20% 사이의 격차는 꾸준히 벌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숙제를 최소화한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가정의 지원 여부가 학업 격차를 만드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수치가 보여줍니다. (출처: ACARA — National Report on Schooling in Australia)

숙제 없는 교육의 명과 암
몇 년을 이 시스템 안에서 키워보니 장단점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좋은 점은 분명합니다. 아이가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하교 후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다 보니 체력도 좋아지고, 좋아하는 취미에 온전히 몰입할 시간이 생깁니다. 공부는 지겨운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 없이 학교를 매일 즐겁게 갑니다. 이것은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면은 꽤 냉정합니다. 집에서 따로 서포트해주는 가정과 방과 후에 정말 놀기만 하는 아이들의 학업 격차가 고학년으로 갈수록 벌어집니다. 매일 책상에 앉는 습관이 안 잡혀 있다 보니, 고등학교에 올라가 갑자기 숙제와 시험이 쏟아질 때 크게 방황하는 아이들도 주변에서 봤습니다.
한국 교육이 아이들을 너무 일찍 경쟁으로 내모는 과잉의 문제라면, 호주 초등 교육은 자칫 기초 학력을 놓치기 쉬운 결핍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답은 없겠지만, 호주에 살면서 저는 공부의 주도권을 아이에게 서서히 넘겨주는 법을 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불안하긴 해도 매일 해맑게 웃으며 하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이게 맞나 보다 싶다가도, 또 한국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솔직한 부모 마음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호주 초등학교 숙제가 정말 거의 없나요?
네, 저학년은 홈 리딩 10분이 전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고학년이 돼도 주 30분 내외의 자율 미션이 중심입니다. 한국처럼 매일 문제집을 풀거나 받아쓰기를 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NAPLAN은 무엇인가요?
전국 학력 평가 시험으로 Year 3, 5, 7, 9 때 치릅니다. 읽기, 쓰기, 수학을 평가하며 학교와 가정에서 아이의 학업 수준을 확인하는 기준이 됩니다. Year 2 말부터 슬슬 준비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집에서 따로 공부를 시켜야 할까요?
선택의 문제입니다. 학교만으로도 기본 학력은 충분히 키울 수 있지만, 더 높은 수준을 원한다면 구몬이나 사설 학원을 병행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아이의 스트레스와 학습 욕구 사이의 균형이 중요합니다.